1998. 09. 01 / 『월간조선』 98-09 (598-603면)


연재기사 「5백년 조선 여행」의 의미

 손에 잡힐 듯한 조선을 그려냈다


김  현

서울시스템주식회사 상무이사


  지난 2년 4개월 간 『월간 조선』 지면을 통해 연재되었던 「CD-ROM을 타고 들어가 본 조선 왕조 500년 여행」이 이번 호에 그 마지막 기사를 싣게 되었다.  『월간 조선』 관계자들에게 들은 바로는, 한 가지 기획 기사가 이처럼 오랫동안 연재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기사를 흥미롭게 읽는 독자의 수와 그들의 관심도는 매달 숱한 전화와 편지를 받아 온 담당 기자나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 연구원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지난 2년간 내가 만나 온 많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회사 경영자, 공무원, 교사, 해외 유학생.... 그들은 내가 『조선왕조실록 CD-ROM』의 개발에 관계했다는 말을 듣고서는 너무도 반가워했고, 그 잡지를 사면 제일 먼저 「조선 여행」 기사를 펼쳐 본다고 했다. 기사의 어떤 내용이 그런 관심을 갖게 했느냐는 질문에, “예전에는 ‘전설의 고향’에나 나오는 음산한 산골마을처럼 생각되었던 조선사회에 그처럼 다양하고 역동적인 모습이 있었다는 데에 놀랐다”고 했다. “몇 백 년 전의 사회에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보는 갖가지 행태가 그대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재미있다기보다 충격이었다”고도 했다.

  물론 필자의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조선 여행」 기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필자 자신이 한국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니만큼, 지인들 가운데에는 이른바 국학자(國學者)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의 것보다는 옛 것에, 남의 것보다는 우리의 것에 더 관심을 쏟는 사람들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로부터는 「조선 여행」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은 바가 없다. 간혹, “한 두 번 읽었다”거나 “그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서도 “그런 류의 기사는 마땅치 않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것은 분명히 이유 있는 저항이다.

  1995년 10월 『조선왕조실록 CD-ROM』이 간행된 이후, 우리나라 출판계에는 ‘조선시대 신드럼’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주제로 하는 책들이 줄을 이어 출간되었다. 그 중의 상당수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경이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TV에서는 이 CD-ROM이 자료 제공자 역할을 한 역사 드라마들이 시청률의 수위를 달렸고, 공영 방송의 대표적인 역사 교양 프로그램에서는, 예전 같았으면 명망 있는 역사가가 모셔졌을 스튜디오의 중앙에 이 CD-ROM을 운영하는 컴퓨터가 설치되고 거기에서 뽑혀지는 자료가 사회자의 질문에 답을 하는 장면이  매회마다 연출되었다. 지난 2년 동안 서점의 서가에 홍수를 이루는 역사서들과 TV 프로그램을 통해 그야말로 많은 대중들이 지나간 역사와의 ‘친화’를 경험하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 속에는 이른바 역사 전공자들이 “저래도 되는 거야?” 하는 거부감을 보일 이유가 존재한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학문적인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을 탐구해 온 전문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단편적인 사료 몇 가지에 아마추어적인 상상력을 결부시켜 성급하게 ‘이렇다, 저렇다’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널리즘이나 역사 소설에서 다루는 ‘역사’ 속에는 딱히 아니라고는 반박하지 못해도, 확실히 그렇다고 인정해 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저자의 확신에 찬 어조에 힘입어 불변의 정설처럼 기술된다. 그래도 되는 건가?

  『월간 조선』의 「조선 여행」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전문가들의 의식의 저변에는 ‘저널리즘 수준의 역사’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이들이 『조선실록 CD-ROM』 자체에 대해 보내는 시각도 곱지만은 않다. 연구자들에게 자료 찾기의 수고를 덜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실록 기사를 읽을 때 문자로 나타나지 않는 행간의 의미까지도 읽을 수 있는 식견이 없는 비전공자들이 그저 컴퓨터 자판 몇 번 두드려 이 기사 저 기사 불러내어 불확실한 이야기의 소재로 쓰이게 한 것은 위험한 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전문가들이 역사적 기록에 손쉽게 접근하여 그 사실들을 이야깃거리로 가볍게 다루는 데에는 분명히 왜곡이나 오해, 침소봉대의 위험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위험성은 ‘역사의 대중화’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사료를 다룰 때는  상호간의 논리적 맥락을 찾기 어려운 많은 사실(史實)이 뒷전으로 밀리고 버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아마추어들이 대중적인 호기심이라는 각도에서 그러한 사실에 접근할 때는 단지 그것이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독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의 소재가 그만큼 풍부해지는 것이다. 아카데미즘을 위해서도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학자들은 대중적인 역사에 담긴 오해와 과장을 바로잡을 새로운 과제를 얻게 된다. 더욱 깊이 있는 학술적 연구의 동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1996년 봄 「CD-ROM을 타고 들어가 본 조선 왕조 500년 여행」시리즈를 기획했을 때, 우리가 추구한 목표는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버라이어티 쇼’를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조선 여행」은 실록 CD-ROM의 발간 직후, 그것이 전문가들의 폐쇄적인 연구 영역에 머물러 있던 조선시대사를 일반인의 교양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는 가교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 『월간 조선』 책임자 조갑제 국장의 제안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그 후 2년이 넘도록 초인적인 필력으로 150매가 넘는 원고를 다달이 써낸 이 연재 기사의 집필자는 김용삼 기자이다. 김 기자의 노력을 초인적이라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매달 「조선 여행」 기사를 쓴다고 해서 잡지 기자의 본분인 시사 기사를 쓰는 의무를 면제받았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 여행」의 집필은 그에게 있어 덤으로 부가된 과제였다.  그는 보다 센세이셔널한 시사 기사를 찾아 남미로, 중국으로 쉼없이 출장을 다녔다. 안보 문제를 자신의 주 관심사로 삼는 그였기에 서해 5도 수비대에서 남해의 UDT 훈련장, 동해의 잠수함 좌초지까지를 쉼 없이 돌아다니고 제3국을 통한 북한의 정보도 집요하게 추적하여 황장엽 기사의 특종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조선 여행」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그 달의 원고가 마감된 직후 4, 5일간의 휴식 기간. 남들에게는 한 달 간의 긴장 끝에 한 숨 몇 번 돌릴 수 있는 시간이 그에게는 고생스런 현장 취재보다도 더 무겁고 힘든 시간이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김 기자가 아무리 워크홀리스트적인 수퍼 라이터라 할지라도 그토록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일이 단지 사오일간의 집중력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글쓰기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짐작했을 것이다.  서울시스템주식회사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의 이남희 부장과 고윤희, 정혜은, 제소연 연구원. 이 네 사람은 김 기자의 손에서 며칠만에 150여 매의 기사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갖추는 일을 해 왔다. 조선사 전공자인 이들은 매달 다음달의 「조선 여행」을 어떤 주제로 갈지를 정하는 편집 회의를 열고, 그 주제의 세부 분야를 정한 다음, 『조선왕조실록 CD-ROM』을 검색하여 중심적인 기사들을 발췌하고, 그것에 연관된 연구 자료들을 조사하여 사료 해석의 보충 자료를 마련하였다. 김 기자의 원고가 만들어지면, 연구원들은 집필 내용이 사료의 문맥과 일치하는지를 검토하고 일반인들에게 익숙치 않은 역사 용어에 대해서는 주석을 다는 보완 작업을 수행하였다. 주제에 따라 그 분야의 전공자에게 원고를 보내 문제점을 지적받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다만, 이 경우  사실과 어긋남이 분명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수정하였지만, 검토자의 의견이 “이 사실만 가지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도일 경우는 그 문제 제기를 무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우리의 「조선 여행」은 역사 논문 집필이 아니라, 저널 기사라는 사실을 전제했기 때문이며, 역사 해석의 정설을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료의 제시와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여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김용삼 기자와 「조선 여행」을 처음 기획할 당시 우리의 머리 속에 강한 인상을 드리우고 있었던 책은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가 쓴 『로마인 이야기』였다. 그 책은 당시에 이미 국내에서만도 50만 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 셀러였다. 전문적인 수준의 역사 이야기가 그 정도의 독자를 얻는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는 일이 아니었다.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조선인 이야기’가 가능할까? 어쩌면 이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알기 이전, 필자가 처음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를 구상했을 때부터 나의 의식이 대면해 온 화두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조선 여행」은 바로 ‘로마인 이야기’를 흉내낸 ‘조선인 이야기’를 목표로 기획된 것인가?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다’이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아직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조선 역사는 시오노 나나미를 매료시킨 로마 역사만큼 자기 모습을 드러낸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이 쓴 고대 로마의 이야기가 왜 그렇게 성공적일 수 있었을까? 우리가 몰랐던 지식이 그 속에서 넘쳐나기 때문일까? 작가의 탁월한 역사 해석 때문인가? 로마인 이야기에는 로마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지만, 그 대부분은 우리가 다른 역사책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그 역사적 사실을 간추려서 엮어간 작가의 사관 역시 특별히 기발하다거나 진보적이라고 할 것 없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평범한 삶의 원리였다. 그런데 왜?

  『로마인 이야기』는 그야말로 평이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평이함’은 억지로 쥐어짜는 데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여러가지 자료에서 입수된 다양한 정보들을 충분히 소화해서 저자 자신이 직접 그 시대에 살았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성공은 일차로 독자에 앞서서 ‘로마인은 어떻게 살았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성실하게 찾아간 저자의 노력이 낳은 산물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로마사에 관한 아무런 공식 교육 과정도 거치지 않은 작가에게 고대 로마의 면면을 다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한 서양사의 기존 연구 성과들이다.

  그렇다면, 고대 로마보다 2000년이나 더 우리에게 가까운 ‘조선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여전히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현대의 한국인들에게 그처럼 평이하게 이야기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 시오노 나나미 같은 작가가 없어서일까?  필자가 생각하는 이유는 한 가지. 조선시대의 너무도 많은 부분이 아직도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 그 자체와 역사를 이야기할 이야기꾼 사이의 가교가 너무도 빈약한 것이다.

  ‘역사’와 ‘역사 이야기’ 사이의 가교란 옛 사람들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들이다. 그러한 정보가 풍성하게 제공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억지로 쥐어짜듯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그것이 제아무리 기발한 상상력을 담고 있다고 해도 역사 이야기로서의 매력을 상실한다. 일본의 대표적인 역사 소설가의 한 사람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지고 왕정이 수립되는 과정의 동란기에 활역한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생애를 주제로 한 ‘용마(龍馬)가 가다’로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우리나라에도 소개된 바 있는 그는, 소설가인 그가 어떻게 역사에 대해 그토록 해박한 지식을 가졌는지, 어쩌면 그렇게 지나간 역사를 생동감 있게 재현해 낼 수 있는지를 묻는 독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자기는 틈만 나면 가까운 도서관을 찾아가 ‘아동 백과사전’을 읽는다고.....

  우리가 한국의 아동 도서 수준을 생각하고 시바 료타로의 역사적 안목을 핍가한다면 큰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역사 참고서가 된 일본의 아동 도서들은 당대 최고 권위의 학자들이 지식의 큰 줄거리는 물론 어린이들의 흥미를 돋울 자질구레한 문제들까지 이것저것 평이하고 자세하게 설명해 놓은 그런 책들이다. 역사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일상의 필요에 의해서건 사소한 호기심에서건, 알고자 하는 수준의 정보는 속속들이 포함하고 있는, 그야말로 대중을 위한 참고 도서인 것이다.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공자들의 논문 속에만 갇혀서 소위 학술적 주제라고 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지리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평이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다양한 구색을 갖추어 대중을 위한 지식으로 개방되었기 때문에 작가가 소설 속에서 소품처럼 쓸 수 있는 여러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우리의 역사 그 자체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매개할 공구서(工具書)들이 서양이나 일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한국의 현실에서,  ‘조선왕조실록 CD-ROM’은 그러한 도구적 역할의 한 부분을 담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월간 조선』을 통해 지난 2년 4개월간 연재해 온 「조선 여행」은 그 기본적인 역사 탐구의 도구를  이용하여  얻어질 수 있는 정보의 유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그 응용 방법을 제시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평가한다.  ‘로마인 이야기’와 같은 ‘조선인 이야기’는 그러한 전초 작업의 성과들이 보다 풍부하게 산출되었을 때, 그래서 역량있는 작가들이 쥐어짜내는 어려움 없이 넘쳐나는 정보의 토대 위에서 자유롭게 창의적인 해석을 덧붙일 수 있을 때 쓰여질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여행」이 연재되는 사이 역사 전공자, 비전공자를 불문하고 우리 역사를 일반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식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젊은 저술가들이 조선사회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는 많은 저작을 산출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조선왕조실록 CD-ROM』과 「조선 여행」 기사가 그러한 저작의 집필에 일조를 한 사실은 우리 모두의 보람이기도 하다.  「조선 여행」의 연재를 마치기로 결정한 이유는, 이제는 우리가 아니더라도 『조선왕조실록 CD-ROM』이나 최근에 간행한 『고종․순종실록 CD-ROM』을 가지고 조선사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다른 여러 사람들이 할 수 있게 되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3년 전 『실록 CD-ROM』이 처음 간행되었을 때, 도대체 그것이 무엇에 필요한 것이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았을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조선 여행」의 연재는 일단 마무리를 짓지만, 조선시대의 모습을 일반에게 알리는 한국학 데이터베이스연구소와 『월간 조선』의 노력은 앞으로 다른 형태로 진행이 될 것이다.  현재 CD-ROM으로 보급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이 인터넷을 통한 온라인 서비스로 제공될 예정이며, 그와 함께 「조선 여행」의 집필 과정에서 축적된 스크랩북 백여 권 분량의 분야별 조선시대사 연구 자료도 인터넷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유될 수 있는 길을 찾을 것이다.


  단일 민족이어서 민족적 자긍심이 유난히 강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국제화 시대의 개방적인 자세에 장애가 된다고도 하는 우리가 정작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해서 너무도 피상적으로 알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역사의 전문가나 비전문가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하는 바이다.  혹자는 “역사를 알면 미래를 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거듭 읽는 동안 필자가 얻은 확신은 적어도 “우리의 역사를 알면 현재의 우리를 좀 더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들은 IMF 시대의 세계화 요구와 대치하고 있는 수많은 ‘한국적인 것’의 유래와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발휘해 온 기능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웅변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지난 1 세기 동안 서양 문물에 휩쓸려 우리의 것을 모두 잃어 버렸다고 한탄해 온 우리의 의식의 저변에 실제로는 조선시대가 너무도 견고하게 잔존해 있었음을 알게 한 것이 근년의 IMF 사태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과거의 의식에 얽매여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역사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우리 국민 모두가 자기 자신과, 우리 가족, 우리 사회를 비춰볼 수 있는 역사의 거울은 평이하면서도 풍부한 정보를 전달하는 대중적인 역사책이다.  우리 역사의 대중화에 대한 역할을 자임하며 「조선 여행」의 집필에 혼신의 노력을 쏟은 김용삼 기자, 2년 4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지면을 내주시면서 그 성과를 주목해 오신 조선일보사 서희건, 조갑제 국장께 감사드린다.